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틀란트 해전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[[https://en.m.wikipedia.org/wiki/List_of_ships_sunk_at_the_Battle_of_Jutland|격침된 함선 목록]]. Battlecruiser action이 비티와 히퍼의 전초전, Fleet action이 본게임, Night action이 후퇴하며 발생한 야간전이다. 겉으로 보이는 영국의 전술적 패배원인으로는 [[도거 뱅크 해전]]의 교훈으로 독일 전함들이 탄약고와 포탑에 철저한 방염대책을 추가한데 반면 영국은 속사에 주력하기 위해 포탑 내에 적정량보다 많은 포탄과 탄약을 쌓아놓는 등 탄약의 안전한 취급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더 소홀해졌고, 이것이 포탑/바벳을 뚫고 들어온 적탄에 포탑과 양탄기에 쌓인 탄약들이 유폭하며 함을 폭침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. 이것은 비티 제독의 순양전함대에서 특히 부각되었는데 속사에만 집중하느라 안전 대책과 명중률에 소홀해졌고[* 실제로 비티가 지휘하는 순양전함대의 명중률은 매우 낮았다.] 이에 대해서 젤리코 제독이 지적을 했음에도 반발하며 무시했고 그 결과 유틀란트 해전에서 순양전함이 폭침하면서도 전과는 거의 올리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. 정작 본인의 기함은 대파되었지만 살아돌아왔다. [[파일:external/www.battle-of-jutland.com/sms-seydlitz_02.jpg]] 독일의 순양전함 [[자이들리츠급 순양전함|자이들리츠]].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대표적인 불침함이다. 당장 자이들리츠를 위시한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미친듯이 두들겨 맞고 거의 침몰 직전까지 몰렸지만 강도높은 훈련과 이전 해전들을 분석해 얻은 결론들을 바탕으로 한 잘 짜여진 매뉴얼대로 응급수리를 하고 탄약고를 재빨리 침수시켜 유폭을 막는 등 적절한 대응으로 결국 살아남았다. 건조당시 예상했던 적의 화력을 훨씬 능가하는 15인치 철갑탄을 몇 발이나 맞았으므로 살아서 돌아왔을 때 자이틀리츠는 침수가 심해 배의 흘수가 너무 깊어져서 입항이 힘들 정도로 손상이 심해[* 당장 위 사진을 보면 자이들리츠의 주포가 포신이 빠져 있는데, 이는 전투 중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홀수가 너무 깊어서 항구 입항이 어려워지자 무게 감소를 위하여 승조원들이 입항전에 제거한 것이다. 이렇게 간신히 무게를 줄이는 작업을 하고나서야 자이들리츠의 흘수가 얕아져서 입항할 수 있었다고.] 장기간의 수리가 요구되어 한동안 전력에서 제외되었다. 또한 전술적인 측면에 한정하더라도 독일의 압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. 격침된 함정 중 1급 전력은 영국의 퀸 메리와 독일의 뤼초우뿐이다. 영국의 인빈시블과 인디패티거블은 비교적 오래된 함정이라 비교적 가치가 적어서 손해이기는 하지만 앞의 두 함정만큼의 손해는 아니다. 그리고 독일의 포메른은 아예 가치가 없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고 격침된 영국의 장갑순양함 3척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. 한편 침몰한 독일의 경순양함 4척 중 3척은 최신형이라 순양함급에 있어서는 독일의 손해가 더 큰 편이다. 게다가 기술력과 경험의 문제로 독일 함정의 평균 수리기간은 영국 함정의 수리기간의 2배가 넘어갔고,[* 이는 기재 태세와 손상 통제에 대한 전훈을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 대비 일찍 얻은 것과, 다소 간의 전장의 행운이 독일 쪽으로 작용한 결과도 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. 얻어 맞는 것 자체는 상호 비슷하거나 독일 해군이 오히려 더 많이 얻어 맞았지만, 유독 영국 해군의 순양전함들만 어이없게 유폭하면서 영국 쪽의 손해가 상대적으로 커진 것이다. 반면 독일 해군은 더 많이 얻어 맞고 중파/대파된 배가 많지만 여하간 침몰은 면했기에, 겉으로 보이는 전손(Total loss)은 적어도 전투 직후 재동원 가능한 전력에선 열세가 심해진 것이다. 만약 영국 해군 쪽에서 유폭이 안 났거나, 독일 해군 쪽에서도 비슷하게 유폭이 났다면 전술적 측면에서도 자이들리츠는 확실히 격침되는 등 영국의 승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.] 수리가 필요한 군함은 영국의 2배인 14척이었다. 무엇보다도 젤리코는 귀환한 당일에 해전 이전의 전력 거의 전부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독일의 셰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. 전략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다. 비록 젤리코의[* 젤리코는 유틀란트 해전을 치른 몇달 뒤 제 1 해군경(해군참모총장이라고 보면 된다.)으로 영전한다.] 뒤를 이어 대함대의 사령관이 된 비티는 "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독일 해군이 출동하지 않는 것"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략적인 승리도 결국은 독일 해군의 출동의지에 달려 있었다는 어정쩡한 것이었지만, 결국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독일 해군은 이후 영국 수상함대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군항 안에 틀어박혀 있게 되고, 대신 [[유보트]]를 이용한 통상파괴전에 집중하게 된다. 이에 대한 아래의 명쾌한 비유가 유명하다. >"The imprisoned got out of their cell, punched the jailer & then returned." >"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를 후려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." 그러나 그 통상파괴전이 [[미군]]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을 굶겨 죽이지도 못했다. 게다가 [[백일 전투]]이후 사실상 패전이 결정된 독일을 빠르게 항복시킨 단초도 [[킬 군항의 반란]]으로 알려진 수병 폭동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